지난 9월에 우먼타임스에 ‘선물’에 대한 글을 썼다(9월 2일 ‘딩동,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편). 올해 내 생일에 딸과 아들에게 나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아이들은 내게 선물을 주는 대신 ‘아동청소년그룹홈’에 치킨 쿠폰을 보냈다는 내용이었다.그 글을 읽은 지인 몇 분이 아이들에게 치킨을 보내주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몇 년 전에 그림을 배우러 다녔던 미술학원의 선생님도,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분도 연락을 주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룹홈’에 선물을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그분들의 연락은
“언니, 나 연희.”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오랜 세월을 건너온다.딱 일 주일 전이었다. 9월 들어 내가 다녔던 대학을 매주 오갈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가 본 학교는 많이 변했다. 교정을 걷다가 우연히 들어간 건물이 새로 지은 간호대 건물이었다. 그곳에서 친했던 후배의 이름을 발견했다. 아, 공부를 계속해서 교수가 되었구나.가방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었다. 밤이 늦어 안내대에 사람이 없어 방문자 명단을 적는 곳에 쪽지를 올려 두고 왔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거의 30년 만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엄마, 선물이 있어."퇴근하는 아들 손에 내가 좋아하는 도넛 상자가 들려있다. 웃는 얼굴이다. 엄마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같이 먹으라며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 커피를 내려준다. 도넛 한 입과 커피 한 모금을 먹는다. 달달함과 쌉쌀함이 어우러지면서 녹는다. 나도 웃는 얼굴이 된다."선물이 있어."오늘은 선물을 받는 날인가 보다. 아들이 빵을 선물로 내밀기 몇 시간 전, 점심에 만난 친구한테 선물을 받았다. 시인의 책 한 권과 빨간색 작은 필통과 알록달록한 색의 샤프 연필 세 자루다. 싱긋 웃는 표정으로 건네
“아들 셔츠는 내가 다림질을 해 줘요.”얼마 전에 만난 지인의 말에 내 아버지가 생각났다. 60대 중반의 남성인 그분은 주말이면 직장에 다니는 30대 아들의 셔츠를 다려준단다. 우리 아빠도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아들의 셔츠를 다려주셨다.거실 바닥에 아주 오래된 진초록색의 거친 군용담요를 펼치고 물뿌리개를 준비한 후 깨끗하게 빨아진 셔츠를 챙긴다. 담요 위에 셔츠를 놓고 깃 부분에 칙칙 물을 뿌린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로 힘껏 눌러준다. 후줄근하던 셔츠 깃이 빳빳해지면서 모양이 살아난다. 다리미가 셔츠의 팔을 지나
“이건 어떻게 개야 할지 모르겠어.”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아들은 빨래를 개고 있었다.“갤 때마다 어려워.”찌개에 넣을 애호박을 썰던 나는 아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들의 손에는 내 브래지어가 들려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나도 잘 몰라. 너 편한 대로 해.”그렇게 대답해놓고 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본다. 솔직히 40여 년을 저것을 몸에 붙이고 살았던 나도 어찌 개야 할지 잘 모른다.“여름에 저걸 하면 엄청 덥거든.”찜통 날씨에도 찌개를 끓인답시고 불 앞에 서 있던 내가 말했다.“응. 그럴 것 같아.”아들은 내 말에
거센 빗줄기가 퍼붓던 며칠 전 수원에서 ‘옥상 위 달빛이 만나는 자리’라는 인상적 제목의 연극을 보았다. ‘얘기 씨어터 컴퍼니’가 올린 이 연극은 죽고 싶어 옥상으로 올라온 네 사람의 이야기다.조그만 싱크대 가게를 운영하는 중년의 자영업자. 그는 일이 줄어들고 늘어난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어느 고층 아파트의 옥상에 올라간다. 새아버지와의 문제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여고생. 그도 죽고 싶어 옥상을 찾는다. 경제 문제로 시작된 부부싸움으로 함께 죽겠다는 젊은 부부도 등장한다.이 네 사람은 우연히 같은 옥상에서 만나 서로의
일찍부터 더위가 시작됐다. 연일 30도가 넘는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아 습기도 많다. 작년에 언니가 보낸 삼계탕을 끓이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 언니는 찹쌀과 인삼이 살짝 덜 익었으니 다시 푹 끓여서 먹으라는 문자를 보냈다. 처음 이 문자를 보았을 때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피곤했고, 날은 더웠고, 밤에 출근할 생각에 마음이 바스락거렸기 때문이다.덜 익은 것을 먹을 수는 없는지라 할 수 없이 다시 끓이다가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닭의 양다리를 야무지게 실로 묶은 모양이 보였다. 문득 머릿속에 언니가 삼계탕을 만드는 과정
아들이 으슥한 밤에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한두 시간을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날 살짝 뒤쫓아 가보니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통화를 하면서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다. 표정이 달달하다.아들이 요즘 수상하다. 자꾸 씻는다. 공을 들여 세수하고 화장수를 꼼꼼하게 바른다, 남성용 수분크림도 바른다. 눈썹 손질도 한다. 메이크업 베이스라는 피부색을 고르게 해주는 화장품도 바른다. 이십 대 초반 남성이 사용하는 향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얼굴이 환하다. 요즘은 화장하는 남성도 꽤 있지만, 그런
어릴 때 냉면은 특별한 음식이었다. 요즘처럼 전문식당에 가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여름날 어쩌다 한 번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퍼런 비닐 포장에 들어있는 청수냉면을 사다 먹었다. 몇 해 전 마트에서 이 냉면을 발견하고 반가웠다.무더위가 계속되는 여름날 저녁 엄마는 큰 솥에 면을 삶으셨다. 비닐 포장지에 담겨있던 뻣뻣한 면을 물이 펄펄 끓는 솥에 넣고 휘휘 젓다가 면이 부드러워지면 큰 소쿠리에 건져 찬물에 헹궜다. 육수는 요즘 라면수프처럼 가루로 된 것이 들어있었다. 큰 함지박에 여러 개의 수프를 탁탁 털어 넣고 물
내 엄마 장 여사는 음력 3월 하순이 생일이다. 양력으로 하면 4월 말이나 5월 초다. 백 가지 꽃이 피어나는 계절에 태어나셨다. 하지만 엄마가 살아온 삶은 꽃처럼 곱지만은 않았다.장 여사가 태어난 1935년은 일본이 조선을 점점 더 심하게 수탈하던 시기다. 1936년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 전쟁이 끝나던 1945년까지 쌀과 온갖 곡식들을 빼앗아 조선사람들을 굶주리게 했으며 전쟁물자로 사용하기 위해 놋그릇, 심지어 놋수저까지 쓸어갔다.장 여사는 그 당시 나무젓가락과 숟가락으로 밥을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며칠 전부터 야외에서 마스크 쓰기는 해제되었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쓴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부스스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나섰다. 걷다 보니 5월 초인데도 초여름 날씨라 마스크를 벗어 손목에 걸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생기면 얼른 다시 쓰려고 굳이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나도 마스크를 준비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주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에는, 그러니까 코로나가 극심해져서 모든 국민이 집 외의 모든 공간에서
날이 따뜻해지면서 주말 나들이를 가는 사람들이 늘었는지 차가 밀린다. 신호가 바뀌어도 차가 몇 대 빠지지 못하고 슬슬 구르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무료함을 달래려 라디오를 켰다. 클라리넷 연주곡이 흐른다.음악이 끝나자 진행자가 연주자에게 연습은 얼마나 하는지 물었다. 그는 하루 세 시간 이상 연습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생각보다 연습량이 적다고 놀라는 진행자에게 연습을 오래 하면 입술이 퉁퉁 붓고 쓰라려 오래 연습할 수 없다고 설명해준다.클라리넷이라는 악기는 마우스피스의 리드 부분이 아랫입술을 눌러 아랫니가 입술 안쪽을 자극하여 통증이
예전에 살던 아파트의 옆집은 '이상한 이웃'이었다. 우리 집 작은 방 창문을 열면 복도를 통해 그 집 현관문이 보였다. 그 이웃은 자기 집 현관 번호키 비밀번호가 노출될 수 있으니 창문을 열지 말라고 요구했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조였다.우리 가족을 예비 범죄인 취급하는 그녀의 무례한 태도가 기분이 나빴다. 언젠가는 현관문 밖에 음식물 쓰레기가 담겨있는 비닐봉지를 내놓기도 했다. 나는 그 이웃을 몰상식하고 심술궂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몰래 눈을 흘겼다.여름
사람이 숫자로 치환되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아직 나는 숫자가 아니다. 동료 중에 ‘송’과 ‘박’이 먼저 숫자가 되었다. 그다음은 ‘우’였고 ‘김’이다. 오늘은 드디어 ‘황’이 숫자로 변했다. 그들은 원칙에 따라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을 대신할 인력은 없다. 하루아침에 사람을 구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남은 사람들이 두 사람 세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한다.하나의 팔과 하나의 다리만 있는 모습이다. 남은 팔의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우고 걷는 것 같다. 걷기도 힘든데 현실은 뛰어야 한다. 울퉁불퉁 돌이 튀어나온 길을 뛴다.
얼마 전에 딸의 졸업식에 다녀왔다. 아니 졸업사진 촬영에 다녀왔다. 올해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졸업생 전체가 모여서 하는 졸업식은 없었다. 코로나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순식간에 전염될 수 있다는 변종 오미크론의 빠른 증가로 오히려 작년보다 더욱 싱숭생숭하다.졸업식은 하지 않는 대신에 원하는 날짜에 맞춰 졸업가운을 빌려주었다. 그 옷을 입고 친구들과 부모님과 모여 교정에서 사진을 찍는 정도만 할 수 있었다. 비록 졸업식은 없었지만, 가슴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환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 학생들 모습에 모처럼 교정 여기저기에
야근을 끝내고 퇴근한 아침,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점심때다. 지난밤은 일이 많아 피곤했다. 이런 날은 달콤하고 매콤하고 뜯고 씹을 수 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 치킨이 생각난다. 치킨을 시켜볼까 하는 마음으로 배달 앱을 열어 본다. 아이고 메뉴가 왜 이렇게 많은 것이냐. 어느 집이 맛있더라?혼자서 치킨을 시켜 먹어 본 지가 오래전이라 어떤 것이 맛있는지 모르겠다. 메뉴가 수십 가지다. ‘크림소스’나 ‘치즈’라는 단어가 붙은 이탈리아 파스타 이름과 비슷한 것도 있고, 중국의 소스인 ‘마라’라는 명칭이 붙은 메뉴도 있고, 매운맛을 더
지난 근무표를 뒤져보니 작년 설과 재작년 설 두 번 다 근무였다. 이번 설에도 근무다. 3교대 근무를 하는 병원간호사는 여느 직장인들과 달리 주말에 쉬기가 어렵다. 공휴일도 쉴 수 없다. 그러니 명절은 더욱 챙겨서 쉬기가 어렵다. 특히 근무자가 많지 않은 병원은 나만 명절 근무를 빼달라고 하기 어렵다. 누군가는 나 대신 근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에는 코로나가 아주 심했다. 혹시나 아직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시골까지 번질까 싶어 사람들이 고향에 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하는 간호사인 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작년처럼 올겨울도 사람들은 진력이 나도록 집에 갇혀있다. 어쩌다 만나면 “부스터 샷은 맞았나요” 묻는 게 인사말 중 하나가 되었다.해가 바뀐 지 꽤 되었지만, 머릿속은 아직도 2021년과 2022년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날짜도 헷갈린다. 그러다가 문득 1월이 반도 더 지난 것을 깨닫고 한 일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해졌다.게다가 날씨는 섭씨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한파가 계속되어 길에 나서면 바람도 날이 서있어 매섭다. 찬 공기가 가득한 바람이 퍽 주먹을 날린다. 고개
눈이다. 광장에 눈 온다. 하얀 점들이 차례 없이 다투듯 쏟아져 내린다. 직선으로 이어져 바닥으로 내리꽂힌다.바람이 분다. 흰색의 직선들은 사선이 된다. 사선은 빗금이 되어 서울역의 오래된 건물을 지우고 광장을 지우고 광장을 떠도는 사람을 지운다. 서울역 광장에 얼룩처럼 존재하던 남루를 걸친 사람들을 지운다. 지우고 덮고 하얀 풍경만 남긴다.그때, 점 하나가 빗금을 뚫고 나온다. 추위에 떨며 지워지던 점에게 다가간다. 두 개의 작고 흐릿한 점이 만나 조금 커다란 하나의 점이 된다. 하나의 점이 또 하나의 다른 점에게 제 몸의 일부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을 노랗게 물들이던 은행나무가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로 서 있다. 나무를 올려다보니 가지마다 동글동글한 것을 달고 있다. 겨울눈이다.겨울눈은 나무가 이듬해 봄을 위해 만든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몸,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나무의 겨울눈인 잎눈과 꽃눈은 잎과 꽃의 압축된 정보와 영양을 모아둔 것이다. 나무는 이 겨울눈을 추위로부터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옷을 만들어 입힌다. 목련은 겨울눈의 껍질에 털외투를 입히고 히어리는 껍질 안쪽에 털을 키운다.